몽비의 비망록

정직하게 삶을 바라보고 부끄럼 없이 살아보려는 사내

기록

연꽃이 뭐길래.

몽비, 2020. 7. 19. 22:40

여름이 다가와 녹음이 짙고 비도 좀 내리고 습해질 때 즈음이면, 스승님과 줄곧 연밭을 다녀왔다. 처음 연밭에 발을 디딘 적은 2015년 여름이다. 서울 촌놈인 나는 널찍하고 키 큰 녹색 연잎이 마냥 신기했다. 그 사이에서 연꽃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그 풍경은 내게 아주 생경했다.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곳이 있구나.

당시에 나는 사진에 무척 빠져서 생각을 거치기보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컷 수를 아끼지 않았다. 사진 색 보정에도 맛이 들려 있던 참이었다. 스승님은 이미 익숙하신 듯 차분하게 산책하셨다. 가끔씩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다.

깊이가 보였다. 단순히 깔끔한 프레이밍 덕분일까. 분명 그런 단순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귀가하고 잽싸게 색 보정을 했다. 원하던 분위기를 얻었다. 스승님께 오늘 하루를 간직하고자 사진을 전송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섞여 있던 것 같다.

좌우지간, 내가 보낸 사진에 대한 스승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직도 억양이 생생하다.

"드럽게 못 찍었네."

사진의 깊이에 대한 고민은 스승님의 답장에서 등장했고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이 에피소드가 떠오른 건 근래에 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고 종종 찾아갔던 연밭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때마침 스승님이 연밭으로 초대해 주셨다. 그래서 문득 어젯날 같은 에피소드가 떠오른 모양이다. 자연에게 배우려면 가볍게 떠나야 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몇 번이나 가본 곳이기 때문에 이번 만큼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가야 할지 결정하고 싶었다. 열린 자세로 항상 무언가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민은 몇 가지 이유로 가중됐다. 굵직한 일화 중 하나는 군대에 있다.
군대에서 내가 참 감명 깊게 읽었던 「다시, 나무를 보다」라는 책 덕분이었다. 그 당시 나는 독서를 즐겼던 시기였는데 부대 내에 원하는 책이 부족해 휴가를 나갈 때마다 책을 들여왔었다. 애당초 구입목록에 없던 책이었지만 원하던 책이 보이지 않자 서랍을 이리저리 뒤져서 만나게 된 책이었다. 보자마자 책 표지에 매료됐고 목차를 얼마 살피다가 확신이 들어 집어왔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군생활이 큰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초소 근무로 산자락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항상 소나무가 눈에 밟혔다. 제각기 다른 모양새였다. 한 소나무는 위로 주욱 뻗은 모양, 다른 소나무는 허리가 굽은 노인처럼 구불구불했다. 왠지 모를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최소한 구분할 줄 알고 이름을 알고 싶었다.

책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다시, 나무를 보다」는 나무의 식생과 자연의 섭리가 곧 인간의 삶이라고 들려준다. 얼마나 마음을 울리던지 훌륭한 숲해설을 들은 것 같다. 주로 궁금했던 소나무의 종류도 알게 됐다. 땅에 떨어진 소나무 잎의 개수로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충격이었다. 리기다 소나무라는 이름도 참 낯설었다.

두 번째 이유는 스승님의 사진 전시를 보고 나서다. 스승님은 15년도 넘게 꽤 오래 탐조를 해오신 분이다. 아직 나는 나무만큼이나 새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사진과 병치한 제목과 설명글을 들여다보고 새끼손가락 때만큼은 안 것 같았다. 나무와 새는 인간과 다른 생명이지만 본질은 같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관찰하고 탐구하면 깨닫는 게 아닐까. 우주를 인간의 삶으로 엮은 「코스모스」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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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연밭에 도착했고 스승님께 차분히 이야기를 꺼냈다.

"스승님, 연에 얽힌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그런 거 없다."

"나는 평생 디자이너였다. 특히 산업디자인은 질료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나에겐 그러한 배경이 있다. 연밭에 왔더니 당혹스럽더라. 연잎은 그 자체로 둥글지만 가장자리도 둥글둥글 선이 있다. 그야말로 놀라운 형태가 나를 압도했다. 명확한 주제가 없어 처음엔 어쩔 줄 몰랐다.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돌아갔다."

예상을 빗나간 짧은 답변에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말씀하신 내용을 듣고 연밭이 달라보였다. 그러고 보니 연밭에는 선도 있고 곡선도 있고 결이 있다. 연꽃잎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감촉도 아름답다.

연밭으로 사진 산책을 다녀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주를 탐험하는 일인 것 같다. 무한한 선의 가능성에 압도당하는 것.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의 추상으로 뛰어드는 적극적인 탐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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