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비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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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산책_혼자 가도 좋고 둘이 가도 좋은 곳

몽비, 2020. 10. 18. 18:37

사회조사분석사 2급 재수는 참으로 고됐다. 작업형 공부는 수월한 반면에 필답형 공부는 이해와 암기를 병행해야 하고 무엇보다 압도적인 암기량이 힘들게 한다. 그래도 필답형 40점 전적이 짐을 덜어준다.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느라 힘이 들고 지루한 게 컸다. 산책이 필요했다.

 

마침 친구가 휴가를 나왔다. 친구는 재작년 겨울부터인가 사진친구가 되었다. 혜화에 거주하는 친구는 나이많은 공군 아저씨다. 수유와 혜화는 행정상 구는 달라도 한 동네다. 그만큼 가깝다. 부담 없이 서로 카메라를 가지고 나오기로 했다.

 

어쩌다 산책을 떠났다.

본래 성수를 거닐기로 했으나 혜화에 머물기로 했다. 지겨울 만도 한데 동네 주민도 모르는 은밀한 장소를 찾았기 때문이다. 산책을 시작할 장소는 '어쩌다 산책'이다. 오늘 하루를 요약하는 이름이다. 어쩌다 산책은 서점겸 카페이다. 지도에서는 서점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냥 횡 지나치기 쉬워 지도를 보고 찾아갔다. 그래도 한 번 헤맸다. 혜화역 1번 출구를 시작으로 대학로 자유극장으로 접어들었다. 뒤로는 스타벅스 동숭로아트점과 타셴이 마주 보고 있다. 코앞엔 IBK기업은행이 자리하고 있는데 좌측으로 오르막길, 우측(왔던 방향대로 직진)으로는 내리막길 이렇게 두 갈래길이 있다. 우측 내리막길로 조금 걷다 보면 왼편으로 '여기다.' 싶은 분위기가 나온다.


 

방문하는 날의 계절을 상기시켜주듯 단풍나무가 먼저 손을 흔든다. 나무를 감싸는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가는 동안 답례를 하기 마련이다. 살짝 빗겨 들어가는 입구는 좌측의 서점을 훑게 만든다. 현재 어떤 주제의 전시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방문자의 감탄을 익숙하게 바라보는 친절한 직원분들이 주문을 받는다. 이곳은 소란스러운 알림벨을 쓰지 않는다. 대신 음료와 디저트를 건네주시기 위해 이름을 받아 적으신다. 소소한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신비함을 자아내는 음악과 공간이 퍽 맘에 든다. 그러면서도 위화감은 들지 않는다. 현대적인 감각과 전통을 섞은 느낌이다. 현대미술관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면서도 한옥을 떠오르게 만든다. 창문과 벽의 직선은 한옥의 창호와 서까래를 연상시킨다. 목재를 쓰면서도 따듯한 반사광이 현대적인 느낌을 중화한다. 현대와 전통의 블렌딩이다.

 

공간을 나누면서도 나누지 않았다. 공간의 총량이 특정한 느낌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이 공간의 정체성을 지키는 도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곳, 어쩌다 산책은 제주의 곶자왈 숲처럼 조용하게 즐기는 산책로이길 바란다. 어쩌다 시장은 지양한다. 카페는 입구 단풍나무를 둘러싸는 디귿자(ㄷ) 모양의 구조이다. 입구 주변은 대부분 유리벽이기 때문에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이와 시선이 맞붙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로 조용하고 차분해진다.

한옥의 마당을 계승한 구조와 배치는 고즈넉함을 유지함과 동시에 사람 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축가의 철학이 아닐까. 주문하는 손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나라 건축의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웅장함도 과시도 아니요, 무언가를 채우는 건축이 아닌 비움으로서 풍경을 채우는 '차경'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다 산책 입구 주변의 유리는 단순한 멋이 아니다. 차경을 위한 장치다. 땅에 서 있는 건축은 지붕과 기둥, 기단과 높이로 공간의 성격을 만들 수 있다. 지하는 통제할 수 있는 요인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어쩌다 산책 입구 주변의 구조는 지혜로움이 돋보인다.

 

전통의 느낌을 위해선 으레 서까래, 처마가 있어야 하는 고정관념처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고착을 강요하는 것들이 많다. 이 곳은 그러한 사고에서 자유롭다. 어쩌다 산책의 진짜 의미는 건축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었다. 뚫려 있는 구조가 생각을 환기시키고 다시 피어오르게 만든다. 어쩐지 여기에 머물고 있으면 스윽 생각이 비게 된다. 그리고 저 멀리서 다른 생각이 슬며시 걸어온다. 산책이 선물하는 느낌을 이곳에 앉아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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